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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류소설가 신경숙

by 따즈 2008. 4. 21.
신경숙(申京淑.1963.1.12∼  )

   여류소설가. 전북 정읍 생. 영등포여자고등학교 졸업, 산업체 특별학교를 거쳐 1985년 서울예술전문대 문예창작과 졸업, 같은 해 [문예중앙]에 중편소설 <겨울 우화>가 신인상 당선되어 등단, 2000년 2월부터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

  1993년 장편소설 <풍금이 있던 자리>를 출간해 주목을 받았으며 이후 장편소설 <깊은 슬픔>(1994), <외딴 방>(1995), <기차는 7시에 떠나네>(1999), 창작집 <아름다운 그늘>(1995), <오래 전 집을 떠날 때>(1996), <딸기밭>(2000) 등을 잇달아 출간하면서 1990년대를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잡았다.

  한국일보문학상(1993),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1993), 현대문학상(1995), 만해문학상(1996), 동인문학상(1997), 한국소설문학상(2000), 21세기문학상(2000), 이상문학상(2001)을 받았다.

【경력】

1985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당선되어 작품 활동 시작

1993년 제26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

1993년 제1회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제26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

1995년 <깊은 숨을 쉴 때마다>로 제40회 현대문학상 수상

1996년 <외딴 방>으로 제11회 만해문학상 수상

1997년 <그는 언제 오는가>로 제28회 동인문학상 수상

2001년 <부석사>로 제25회 이상문학상 수상

【경향】

  신경숙은 탁월한 문체, 치밀한 구성, 현미경적인 관찰력으로 침착하게 삶의 풍속도를 그려냄으로써 인간에 대한 탐색이라는 전통적이고도 진부한 주제를 성공적으로 추구하는 한편 그 개성적인 목소리로 페미니떼의 정체를 밝혀내고 있다. 특히 시적통찰력이 돋보이는 그의 언어는 메마른 산문정신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주는 무게를 지니고 있다.

  신경숙의 소설은 존재의 텅 빈 심연을 응시하는 예민하면서도 따뜻한 시선, 미세한 삶의 기미를 포착해내는 울림이 큰 문체로 이미 많은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녀 소설의 인물들에게 이 세계는 화해로운 만남이 가능할 것 같지 않은 비극적 세계이지만 그들은 비록 더듬거림의 발성법으로나마 세계와 그들 서로에 대한 의사소통의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렇듯 소통되지 않는 것, 말해질 수 없는 것들을 서로 손잡게 하려는 이 작가의 힘든 노력은 우리의 가슴에 깊고 서늘한 감동을 준다.

  대표작인 <풍금이 있던 자리>는 유부남과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는 흔한 주제를 편지글 형식으로 다루었는데, 사랑에 빠진 여성의 심리를 서정적이고 섬세하게 묘사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 작품들 역시 쉽게 읽히는 서정적 문체와 섬세한 묘사를 통해 주로 타자(他者)의 주변을 서성거리는 인물들을 그리고 있는데, 소설의 주인공들은 거의 타자의 세계나 자신의 세계를 현실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상처를 받거나 상처를 주는 인물들로 묘사된다.

  그녀의 두 번째 장편소설 <외딴 방>은 신경숙 문학의 또 다른 시원(始原)을 밝혀줄 이정표로 자리매김 되었다. 열 여섯에서 스물까지. 열악한 환경에서 문학의 꿈을 키웠던 소녀 신경숙의 사랑과 아픔의 흔적을 생생하게 담고 있는 이 작품은 사위어가는 노을처럼 소멸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들의 슬프고도 적요한 운명을 단정하게 형상화하고 있다

【문학인생】

  어떠한 환경에 처해서도 인간은 결국 제 갈 길을 가고 만다는 것을 신경숙처럼 잘 보여주는 예도 드물다.

  초등학교 6학년 때야 처음으로 전기가 들어온 깡촌에 살면서도 게걸스러울 정도로 읽기를 좋아해, 버스 간판이고, 배나무 밭에 배를 싼 신문지며, 「새마을」이나 「새 농민」에 나오는 수필이나 소설까지 빠뜨리지 않고 읽었던 것은 그의 '싹수'를 보여 준다. 시인이 되려던 셋째 오빠의 영향으로 오빠가 갖고 있던 시집들을 두루 읽을 수 있었던 것도 그의 행운이었다.

  그러다가 그 시절 동년배의 다른 누이들처럼 고향을 등지고 서울로 올라온 것이 열 다섯 되던 해인 1978년. 구로 3공단 전철역 부근 서른 일곱 가구가 다닥다닥 붙어사는 '닭장집'의 '외딴 방'에서 큰오빠, 작은오빠, 외사촌이 함께 누워 잤다.

  공단 입구의 직업훈련원에서 한 달 간 교육을 받은 후, 공단 안쪽 동남전기주식회사에 취직했을 때 그의 이름은 스테레오과 생산부 A라인 1번. 공중에 매달려 있는 에어드라이버를 당겨 합성수지판에 나사 일곱 개를 박는 것이 1번의 일이었다.

  영등포여고 산업체 특별학급이 생긴 것은 그가 공장에 취직한 지 4개월 뒤. 매일 다섯 시 국기하강식이 거행되면 공장을 나와 학교로 향했다. 그러나 적응이 잘 되지 않아 학교를 며칠 빠졌는데 선생님이 반성문을 써오라고 해서 노트 반 권 정도를 채워서 가져갔다. 반성문을 다 읽고 난 선생님이 정색을 하고 신경숙에게 했던 말은, '너 소설 쓰는 게 어떻겠니?' 였다. 신경숙의 인생을 바꿔놓은 한 마디였다.

  (신경숙에게 글쓰기를 권했던 영등포여고 교사 최홍이는 제자보다 한참 늦은 1999년에 <평교사는 아름답다>는 제목의 교육 현장 에세이집을 냈다.)

  컨베이어벨트 아래 소설을 펼쳐 놓고 보면서, 좋아하는 작품들을 첫 장부터 끝장까지 모조리 베껴쓰는 문학 수업이 시작된 것은 그 시절부터였다. 3년 뒤 대학에 진학했으나, 춥고 외로웠던 구로 공단에 비하면 너무도 환하고 자유로운 다른 세상이라 같이 웃을 수조차 없었다. 오빠가 사준 100권 짜리 삼성출판사 한국문학전집을 모조리 읽어 내리면서 방학 때마다 소설 베껴쓰기에 푹 빠졌다.

  스물 둘에 등단했으나 사람들은 그를 별로 주목하지 않았다. 다시 다섯 해가 지나고 방송국 음악프로그램 구성작가라는 안정된 직업을 갖고 일하던 어느 가을 날, 곧 서른이 되는데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왠지 허전해, 약사 동생에게 말한다. '나 1년만 용돈 줄래? 내가 쓰고 싶은 소설 맘껏 써보고 다시 일하러 가면 안될까?'

  유학이라도 보내 주겠다는 동생의 승낙을 받자마자 방송국을 그만 두고, 집에서 글만 썼다. 1년 동안 <풍금이 있던 자리> <멀리, 끝없는 길 위에> 등 대여섯 편을 썼고, 이것이 작품집으로 묶여 나오면서 더 이상 방송국으로 돌아갈 필요가 없게 되었다.

  신경숙 문학의 밑바탕을 흐르는 도도한 저류는 사랑이다.그 감성의 세계를 특유의 감수성과 고요한 문장, 균형미,그리고 무엇보다 그 모든 것을 내적 시선과 어우러져 자아내는 넓고 깊고 적막한 여운으로 묘파해 내는 것이 신경숙 문학의 독특한 매력이다.

  신경숙은 글을 쓸 때 건강 상태, 정신 상태가 최고조에 이른다고 한다. 리듬감이 생겨 생기롭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모든 감각 기관이 열려 있는 느낌이 된다. 앞 문장을 따라 뒷 문장이 이어지면 그 때가 바로 신경숙이 살아 있음을 만끽하는 때다. 애초에 소설을 쓰지 않는 신경숙이란 존재할 수조차 없었을 것처럼 말이다.

【작품】<겨울우화>(1990), <풍금이 있던 자리>(1993.문학과 지성사), <깊은 슬픔(상,하)>(장편.1994), <외딴방>(장편.1995.문학동네), <오래 전 집을 떠날 때>(1996.창작과 비평), <감자 먹는 사람들>(1996.중편.창작과 비평), <삶과 꿈>(1994), <아름다운 그늘>(1995.문학동네), <깊은 숨을 쉴 때마다>(1995), <모여 있는 불빛, 그는 언제 오는가>(1997.중편), <강물이 될 때까지>(1998.문학동네), <기차는 7시에 떠나네>(1999.문학과 지성사), <그가 모르는 장소>(1999.중편), <딸기밭>(2000), <부석사>(2001), <J 이야기>(2002), <자거라, 네 슬픔아>(2003), <종소리>(2003),

【작품집】<강물이 될 때까지>(1990) <겨울 우화>(1991) <풍금이 있던 자리>(1993) <아름다운 그늘>(1995) <오래 전 집을 떠날 때>(1996) <딸기밭>(2000)

【산문집】<동전 두 개에 관한 생각>(1994.공저) <깊은 숨을 쉴 때마다>(1995.공저) <아름다운 그늘>(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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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체험 수기>

  칠팔 년 전에 동료 소설가가 신간을 출간하고 난 뒤의 인터뷰에서 소설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라는 질문에 직업으로 생각한다고 간단명료하게 대답하는 걸 읽었다. 그는 시로 출발을 해서 소설가가 된 사람이었는데 덧붙이기를 시를 써서 먹고 살 수가 없기에 소설로 돌아섰다고 밝혔다. 자신은 소설 쓰는 일을 철저히 직업으로 생각하며 그렇기 때문에 소설 쓰는 일이 자신의 경제생활을 해결해주지 않으면 다른 직업으로 이동하겠다는 것도 명백히 했다. 그 기사가 내겐 충격이었다. 평소의 그에게 별 관심이 없었으면 뭐 그렇게 생각하나 보다 하고 말았을 것이나 그의 재능을 얼마간 부러워하며 그의 글이 발표될 때마다 찾아 읽어온 터라 더 그랬다.

  나는 감히 소설 쓰기를 직업으로 삼을 생각은 하지 못했다. 이 생각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소설을 써서 내 경제생활을 해결하고 있는 지금도 내겐 소설 쓰기가 직업으로 와 닿지 않는다. 그러기에는 나는 너무나 문학을 사랑했다. 사랑하다 못해 외경시했다. 처음만큼은 아니라 해도 아직도 그렇다. 그렇다고 소설 쓰기를 철저한 직업으로 여기는 그를 낮추기 위해 그의 이야기를 시작한 건 아니다. 나는 그를 존중하며 지금도 그가 새 작품을 출간할 때마다 그의 작품을 찾아 읽는다. 나와는 판이한 그가 구축해가고 있는 세계에 대한 부러움을 갖고 있다. 단지 이 글의 마땅한 필자가 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연상작용처럼 떠올랐던 것이다. 나는 얼마 전에도 “작가가 직업의 개념이 아니듯이”라는 말을 어떤 상의 수상소감으로 쓰고 있는 그런 사람이니 말이다.

  소설가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구체적으로 하게 된 건 여고시절이었다. 그전에는 그저 막연히 책읽기를 좋아하고 노트에다 뭔가를 끄적여보는 걸 좋아했다. 어려서부터 책읽기를 좋아했다고 하면서도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살았던 정읍의 초가에는 책이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도 그 초가의 다락이나 감나무 밑 헛간 속에 엎드려서 책을 읽었던 기억은 또 선명하다. 어쩌면 그건 동화도 소설도 아닌 새 농민이나 글씨도 큼직큼직했던 왕비열전 따위들이 아니었을는지. 배나무 밭을 지날 때면 배를 쌌던 신문지 중에서 연재소설이 나오는 부분을 깨금발을 디뎌가며 찾아 읽었던 기억도 난다.

  세 살 터울의 오빠가 책읽기를 좋아한 것이 내게 영향을 끼쳤는데 책이 귀한 시골에서 그는 어디선가 끊임없이 책을 빌려왔다. 처음엔 만화책이었다. 오빠가 읽다가 밀어둔 일본군과 독립군이 싸우는 만화를 아궁이 앞에서 불을 때면서 들여다보다가 치마에 불이 붙어 종아리를 덴 적도 있다. 처음엔 셋째오빠의 등 뒤에서 책을 읽기 시작했으나 나중엔 내가 오빠보다 더 책을 탐하게 되었다. 오빠가 어디선가 책을 가져오기만 하면 나는 그 책을 가지고 오빠가 나를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도망을 가서 읽곤 했다. 셋째오빠. 내게 책을 빼앗기고 나서 나를 찾아 헤매던 그. 오빠는 책만 빌려오면 내 손이 먼저 타니까 나 모르는 곳에 빌려온 책을 열심히 감추었다. 안데르센 동화집은 장롱이 있던 방 천장에 칼집을 내고 숨겨놓은 것을 오빠가 나간 사이 빨랫줄을 받쳐놓은 장대를 들고 들어가 쑤석거려서 꺼내 헛간으로 도망쳤었다. 야, 어디 있어! 내 책 내 놔! 씩씩대며 내 이름을 부르며 다녔던 오빠. 설마 내가 온갖 물것들이 득시글거리는 헛간에 엎어져서 책을 읽고 있는 줄은 몰랐을 것이다.

  그렇게 책을 읽는 도중에 아, 이런 글을 쓰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일까? 궁금해졌다. 어떤 사람이기에 이런 이야기를 쓰는 것일까? 정읍을 떠나올 때까지만 해도 그건 외경심이었다. 설마 내가 그런 사람이 되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다. 그러다가 사춘기 적에 생긴 뜻밖의 이향이 아마 내 마음에 어떤 우물 하나를 파놓은 것 같다.

  내가 쓴 두 번째 장편소설인 <외딴방>에 보면 내가 나의 태생지를 떠나오던 날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열여섯의 나, 모내기가 끝나던 마지막날 밤 기차를 타고 쇠스랑을 삼킨 우물이 있는 집을 떠난다. 마을의 끝은 철도이고 그 건너에서 아버진 상점을 하고 있다. 엄마는 아버지에게 작별인사를 드리고 거기에서 버스를 타고 나오라고 한다.

  그 버스를 안 마을 쪽에서 엄마가 타겠다고. 집을 나서기 전 열 여섯의 누나는 이른 저녁을 먹고 잠든 일곱 살 동생의 얼굴을 내려다본다. 태어나서부터 일곱 살 누나의 어린 등에서 거북이처럼 붙어 자란 동생은 언제나 누나가 어디 갈까봐 전전긍긍이다. 누나의 등에서 누나의 냄새를 맡고 자란 동생에게 아직 누나만이 최고다. 동생에겐 학교만이 누나를 보내주어야 할 곳이다.

  누나가 학교 갔다 올게, 하면 동생은 꼭 와, 한다. 동생은 놀다가도 해만 저물면 누나, 하고 소리치며 집으로 뛰어들어온다. 아무 데서나 누나, 부른다. 닭 알을 꺼내면서, 똥을 싸면서, 감을 따면서. 한번, 신작로에서 트럭에 머리를 치인 동생은 병원에 실려가서도 누나, 누나, 누나를 찾는다. 찢긴 머리를 꿰매면서도 누나 데려다 달라고 한다. 누나, 어디 있어. 누나한테 갈 테야. 할 수 없이 초등학교 4학년생인 누나는 책가방을 들고 병원으로 하교한다. 동생과 함께 병원에서 자고 병원에서 밥 먹고 병원에서 학교를 간다. 그런 동생은 누나와 헤어질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질 않다. 도시로 간다고 하면 울음보를 터뜨릴 것이기에, 도시로 떠난다고 말도 못하고 잠든 동생의 얼굴을 내려다본다. 동생이 슬며시 눈을 뜨고 누나를 본다. 밤에 외출복을 입고 있는 누나가 이상했는지 잠결에도 묻는다.

  “누나 어디 가?”

  누나는 아니라고 한다. 아무 데도 안 간다고. 안심한 동생은 다시 눈을 감는다. 누나는 잠든 동생의 머리에 아직도 남아 있는 흉터를 만져본다. 아침에 깨어나 얼마나 보챌 것인지. 철도를 건너지도 못했는데 버스의 불빛이 보인다. 잠든 동생을 들여다보느라고 시간을 너무 지체했다. 열여섯의 나, 점점 가까워져오는 버스의 불빛에 조급해져서 아버지! 외친다. 상점에서 아버지가 뛰어나오는 것과 버스가 와서 멈추는 것이 동시에 이루어진다. 아버지, 나, 가요! 열여섯의 나는 아버지에게 제대로 작별인사도 못하고 버스에 오른다. 얼른 버스 뒤로 가서 차창으로 바깥을 내다본다. 아버지가 어둠 속에 우두커니 서 있다. 얼굴은 보이지 않고 실루엣만 우두커니 서 있다....]

  나는 이렇게 태생지를 떠나왔다. 외사촌과 함께였다. 도시에는 큰오빠가 있었다. 하지만 그도 아직 학생이고 공무원인 스물세 살 청년에 불과했다. 외사촌과 나는 도시로 나온 두 달 후에 직업훈련원을 거쳐 구로 공단의 동남전기 주식회사라는 곳에 취직을 했으며 육 개월 후에 열일곱 살이 되는 것과 동시에 산업체 특별학급에 진학하게 되었다. 이 산업체 특별학급에서 보냈던 3년 동안이 나의 여고시절이다. 다시 외딴방을 보면 학교에 처음 갔던 날을 이렇게 기록해 놓았다.

    [... 외사촌은 스무 살, 나는 열 일곱 살. 동남전기주식회사 A라인의 1번과 2번인 외사촌과 나는 1979년 삼월 어느 날 오후 5시에 회사 앞에서 버스를 타고 공단입구를 벗어나 신길동의 영등포여고에 간다. 교문을 들어서자 비탈의 끝 화단에 하얀 동상이 운동장 쪽을 보고 서 있다. 가까이 다가가 동상을 쳐다본다. 단발머리에 하복을 입은 소녀 동상이다. 나는 일 학년 사반, 외사촌은 일 학년 삼반.

  우리는 석양의 운동장에 줄을 서서 입학식을 한다. 애국가를 부르는데 괜히 마음이 숙연해진다. 동복 칼라에 붙은 튤립 모양의 배지를 만져본다. 지난 일 년 동안의 나의 꿈은 다시 교복을 입고 학생이 되는 것이었다. 교장선생님은 삼층짜리 본관 화단에 심어진 라일락나무를 배경으로 단상에 서서 대통령 이야기를 한다. 산업체특별학급을 세운 건 산업전사들에 대한 대통령의 특별한 마음이라 한다. 그 깊은 뜻을 받들어....늙은 교장의 훈시는 석양빛 아래서 길게 이어진다. 교실에 들어온 담임은 칠판에 한문으로 자신의 이름을 쓴다. 崔弘二. 그의 안경이 형광등 불빛 아래서 반짝거린다. 출석부엔 우리들 이름과 번호와 회사이름이 적혀 있다. 그는 우리들 이름과 번호와 회사이름을 부른 다음 대답하는 얼굴을 주의 깊게 바라본다. 출석을 다 부르고 난 뒤 그는 교단에 팔을 짚고 서서 우리들을 지긋이 내려다본다. 그는 갑자기 교장선생님 말씀은 다 틀린 말씀이라고 한다.

   “여러분이 고마워해야 할 사람은 대통령이 아니라 여러분들 부모님들입니다.”

  열일곱의 나, 맨 뒤에서 고개를 쑥 빼고 선생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본다. 느닷없는 그의 발언이 살얼음처럼 느껴진 건 왜였는지. 선명한 눈, 코, 입. 중키. 마른 체격. 그는 가파른 코에 걸쳐져 있던 안경을 고쳐 쓴다. 검은 뿔테 위로 얹어지는 마른 손가락. 그의 입은 다시 말한다.

  “온종일 공장에서 일했는데 그것만으로도 여러분은 이 학교에 다닐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나의 여고시절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지금은 산업체 특별학급에 지원자가 없어서 폐교의 처지에 놓여있다고 하지만 그때는 그렇게나마 학교에 다닐 수 있는 것만도 행운이었던 시절이었다. 마음속에 불타고 있던 향학열과 환경이 잘 맞아주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정말 오래된 옛날 이야기 같지만 겨우 이십여 년 전 일이다.

  산업체특별학급의 학생이 될 수 있는 자격은 일단 산업현장에서 일을 해야한다는 것이었다. 만약 회사를 그만두면 학교도 다닐 수 없는 그런 조건이었다. 그랬는데도 지원자가 많았다. 내가 다닌 동남전기주식회사에서도 열 명의 학생을 뽑는데 160명 정도가 지원을 했고, 회사 내에서 시험이란 과정을 거쳐서 10명이 정해진 거였다. 작업을 하다가 오후 5시가 되면 작업대를 떠나야했으므로 다른 사람들에게 미안했을 뿐 아니라, 외사촌과 나는 스테레오과 A라인의 1번과 2번이었으므로, 우리가 학교에 간 후에도 생산이 중지되지 않게 작업을 마친 것을 쌓아 놓고 학교를 가야했다. 우리가 학교에 간 후에도 생산이 지속될 수 있도록. 그래도 그 오후 5시를 기준으로 해서 나는 작업복대신 교복을 입을 수 있었으며 그것이 참 좋았다. 공중에 매달려 있는 에어드라이버를 끌어내려 나사를 박아야하는 외사촌도 급기야는 더 이상 팔이 올라가지 않는다며 눈물이 고인 눈으로 통증을 호소했다가도 5시가 되면 얼굴이 밝아지곤 했다.

  우리 뿐 아니라 내 여고시절 친구들은 다 그랬다. 제과회사에 다니던 내 짝 왼손잡이 향숙이는 사탕을 봉지에 싸는 작업을 했는데 하루에 2, 3만개를 싸야 해서 손톱이 다 닳아있었다. 어느 날 그 애는 내 손을 보더니 손이 너무 곱다면서 너 회사에서 놀고먹는구나! 했던 기억도 난다. 지금은 외사촌을 제외한 누구하고도 연락이 되지 않지만 그 시절 친구들을 내가 잊어본 적은 없다. 저녁시간 파르스름한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파르스름하게 앉아서 주산이나 타자 부기 그리고 비즈니스 영어를 졸면서 배우던 누렇게 퉁퉁 부어있던 얼굴들. 학교를 통틀어 내가 제일 어렸다.

  남들보다 한 살 빠른 일곱 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했으므로 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년을 묵었어도 나는 일반 여고 일년생들하고 같은 나이였지만 나와 함께 여고를 다니던 친구들은 대개들 열일곱의 나보다는 서너 살씩 많았다. 거기다 그 당시에는 노조가 설립되는 태동기이기도 해서 농성 때문에 학교를 빠지는 친구들도 허다했고, 단발머리를 하고 단화를 신고 책가방을 들고 있어도 스물여섯이었던 친구도 있었다. 교복과 얼굴이 따로 놀았던 친구들. 교복은 너무 소녀스럽고 얼굴은 너무 피로해 보였던 얼굴들.  

  하지만 나의 여고시절이 오로지 피로하기만 했던 건 아니다. 오히려 그 당시에는 피로했다는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발등에 떨어진 일들부터 해결하기 급급해서 힘들다라는 생각조차 없었던 시기였다. 훗날 그 시절을 돌이켜보니 다시 그럴 수는 없을 것 같을 뿐이다. 살다보면 알고서는 그리 할 수 없는 일이 많다. 모르니까 오히려 아무 일 아닌 듯 지나온 일들이 하나 둘이 아니었던 것 같다. 헤쳐나간다는 생각도 없이 그 시절의 시간들은 그렇게 흘러갔다. 극복해야한다는 생각도 없이 하루하루 지나는 사이 극복해졌던 많은 일들. 알 수 없는 일은 그 틈으로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이 강렬하게 싹텄다는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막막하고 고단하니까 그걸 잊게 해 줄 꿈이 필요했던 것 같다. 어려서부터 책읽기를 좋아했고, 막연히 글쓰는 사람을 동경하고 있던 마음이 여고시절부터는 작가가 되어야겠다는 강력한 희망으로 변화되었다. 주산을 놓기 싫어서 타자가 치기 싫어서 무단결석이 이어졌던 언젠가 그 일로 반성문을 써야했다. 나는 대학노트가 거의 반이 채워지도록 반성문(무슨 말을 썼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 반성문이 아니라 무슨 작문 같은 게 아니었을까 짐작해 볼 뿐) 써갔고 그걸 읽은 선생님이 나를 불러 너는 소설을 써 보는 게 어떻겠냐? 하셨다. 이후로 내 마음도 막연히 ‘글쓰는 사람이 되고싶다’에서 ‘소설가가 되어야겠다’로 바뀌었다. 이후로 나는 소설가가 되겠다는 꿈을 지금껏 버린 적이 없다. 지금도 나는 소설가가 되고 싶어한다. 진짜 소설가가.

  내가 다니던 회사에도 노조가 생겼고 회사 쪽에서는 학생들에게 노조에 가입하지 말 것을 종용했다. 노조에 가입하면 학교에 다니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노조에 가입했다가 차례로 불려가 탈퇴서를 썼고 노조원들이 잔업거부를 하는 여름방학동안 우리는 멈춘 컨베이어 앞에서 엉거주춤 앉아 있어야했다. 그때 나는 무심코 작업대 위에 선생님이 선물해준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을 펼쳐놓고 내 노트에 옮겨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작업대 위에서만 진행되던 옮겨 적는 일이 나중에는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틈만 나면 이어졌다. 그때는 어려서 내용이 이해가 안가는 곳도 여러 곳이었지만 나는 소설 속의 영희가 참 좋았다. 영희가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가 내가 내뱉는 말 같았고 그 말들을 내 노트에 옮겨 적으면서 나는 소설가가 되겠다는 마음을 다졌다. 어쩌면 내 여고시절은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을 옮겨 적는 일로 지나갔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 같다.

  삼 학년이 되었을 때 회사는 도산의 위기에 빠졌다. 우리들의 처지도 더욱 나빠졌다. 아무 절차도 없이 해고노동자가 속출했고, 그 해고 대상자의 첫 순위는 학생들이었다. 나도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고 이후 큰오빠가 사다 준 책으로 혼자서 입시공부를 했다. 그나마 대학에 적을 둘 수 있었던 사람은 친구들 중에 나 뿐이었다. 나는 주간아이들 틈에 끼어 매달리기 연습 한 번도 안 해 본 채로 체력장을 치르고 이어 학력고사를 치렀다. 당연히 점수는 매우 낮았다. 서울예술전문대학의 실기점수 위주의 특수한 입시제도가 아니었으면 나는 당연히 그 학교에도 진학할 수 없었을 것이며,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 아니었으면 소설가가 되겠다는 꿈을 그렇게 깊이 간직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소설가가 되겠다고 문예창작학과에 입학했으나 그건 꿈만 같았다. 희망이 이토록 꿈결같이 어렴풋하니 다른 모든 일이 다 그랬다. 여기 있으면 저기로 가고 싶고, 저기 있으면 여기가 그리웠다. 무슨 일을 하고 있어도 이건 아닌데, 싶었다. 이게 아닌데 난 왜 여기서 이 일을 하고 있나.

   한동안 대학 생활에 적응을 못해 나는 학교에 가야 하는 아침마다 머리가 무거웠다. 기어이는 한달 여를 강의를 빼먹고 용산의 외사촌언니가 다니는 동사무소 옆 음악다방에 앉아 그 언니가 퇴근하기만을 기다리며 우울해했다. 외사촌이 너무 귀찮아해 그를 기다릴 수 없는 날은 괜히 거리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피곤해지기를 기다렸다가 귀가하곤 했다. 무엇도 위안이 되질 못했다. 학교에 가도 이게 아닌데 싶고, 외사촌과 하릴없이 거리를 쏘다녀도 이게 아닌데 싶고, 최루탄이 쏟아지는 거리를 걸어다니면서도 늘 이게 아니었다.

  여름방학이었다. 정읍의 부모님 곁에서 여름을 지내고 있던 중이었다. 서울을 떠날 때 가방에 몇 권 넣어간 소설들을 읽는 걸로 여름을 버텼다. 들쭉날쭉으로 하루에 한 편씩 두 편씩 읽어내다가 서정인의 行旅를 읽고 江을 읽던 중이었다. 나는 문득 다시 여고시절 때처럼 단편소설 江을 노트에 옮겨 써보고 싶은 충동으로 만년필에 잉크를 채웠다. 그리고 노트를 폈다. 한자 한자씩 옮겨 적기 시작했다.

   “눈이 내리는군요.”

  버스 안. 창 쪽으로 앉은 사나이는 얼굴빛이 창백하다. 실팍한 검정 외투 속에 고개를 웅크리고 있다. 긴 머리칼이 귀 뒤로 고개 위로 덩굴 줄기처럼 달라붙었는데 가마 부근에서는 몇 가닥이 하늘을 향해 꼿꼿이 섰다.

   “예 진눈깨비인데요”

  강을 시작으로 나는 그 여름을 온통 내 노트에 선배들의 소설을 옮겨 적는 일을 하며 지냈다. 최인훈의 웃음소리, 김승옥의 무진 기행, 이제하의 태평양, 오정희의 중국인거리, 이청준의 눈길, 윤흥길의 <장마>, 최창학의 <창>, 강호무의 <화류항사>.....

  그냥 눈으로 읽을 때와 한자 한자씩 노트에 옮겨 적어 볼 때와 그 소설들의 느낌은 달랐다. 소설 밑바닥으로 흐르고 있는 양감을 훨씬 더 세밀히 느낄 수가 있었다. 그 부조리들, 그 절망감, 미학들.

  필사를 하면서 나는 처음으로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것이다. 나는 이 길로 가리라. 필사를 하는 동안의 그 황홀함은 내가 살면서 무슨 일을 할 것인가를 각인시켜 준 독특한 체험이었다. 방학이 끝났을 때 필사를 한 노트는 몇 권이 되었고. 그 노트들을 마치 내가 쓴 작품인양 가방에 넣고 서울에 돌아왔다.

  나는 내 삶을 소설가로서 살아가리라 다짐했고, 습작시절에 언제나 내가 그 여름방학 동안 내 노트에 옮겨 적어본 작품들이 세상에 퍼뜨려 놓은 그 의미망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할 일을 찾았으므로 이후 나는 고독하지 않았다. 언제나 소설 가까이 가려고 했다. 돈을 모아서 책을 샀고 읽었고 썼다. 한 작가의 어떤 작품이 나를 매혹시키면 남산 시립도서관에 가서 그의 작품을 쌓아놓고 며칠이고 읽었다. 어떤 한 작가의 작품을 다 읽고 나면 한 세계를 얻은 듯이 충만했다.    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신춘문예에 작품을 냈는데 그것이 본선에 올랐다. 당선이 아니고 본선에 오른 것만으로도 힘이 되었다. 아, 이렇게 하면 되는 것인가 보다하는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그해 여름에 출판사에서 퇴근해 돌아오면 집 앞에 있는 독서실에 들어가 원고지 한 장도 쓰고 잘 풀리는 날은 열 장도 쓰고 하다보니 겨우 중편소설이 한편 완성이 되었고 가을에 그 작품으로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으로 등단을 했다. 스물 세 살 때의 일이니 이른 나이였던 셈이다.

  이후의 세월이 벌써 십오년 째다. 사람들은 나를 <풍금이 있던 자리>부터 기억한다. 심지어는 <풍금이 있던 자리>가 나의 첫 책 인줄 아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내겐 첫 책은 <강물이 될 때까지>이다. 처음에 제목이 겨울우화였지만 재출간하면서 제목을 바꾸었다. <강물이 될 때까지> 안에는 9편의 중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이 책에 수록된 작품을 쓰는 동안의 나는 완전 무명이었다. 등단이라는 것은 또 하나의 시작에 불과할 뿐이었으며 그때부터가 더 어려운 시작이었다. 나는 그 9편의 작품들을 잡지사나 출판사 방송국에 다니는 동안에 썼다. 소설을 쓸 시간도 부족했지만 지금과는 사정이 달라 발표할 지면도 없었다.

  겨우 일년에 한두 편 발표할 기회가 왔을 뿐이다. 하지만 나는 처음부터 소설이 돈이 되리라는 생각을 한 적이 없기 때문에 소설을 쓰고 있는 동안엔 늘 행복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때로 나 혼자 쓰고 나 혼자 읽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적도 허다했지만 그건 별개의 문제였다. 무언가 내가 하고 싶은 짓을 하고 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존재감이 느껴졌던 것이다. 그때를 생각하면 이 말이 저절로 나온다. 문학은 좋아하고 좋아해서 시작해야 할 일 이라고. 그래야만 다시 시작하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거라고. 그렇게 한 편 한 편 썼던 작품을 책으로 묶고 나니 스물여덟이 지나가고 있었다.

  새해를 맞아 스물아홉이 되던 그때의 기분을 글쎄,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아침에 눈을 뜨면 목이 묵지근하고 두통이 시작되었다. 세수를 하다가 거울을 들여다보면 눈물이 핑그르 돌았다. 어떻게 이렇게 서른이 되는가? 싶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서른이라고 해봐야 인생의 사춘기에 불과한 것 같은데 그때는 겁나게 늙어버린 기분이었고, 이렇게 늙어버리다니....참담한 기분이었다. 서른 앞에 남아있는 딱 한해.

  나는 그 한해를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실컷 해보고 맞이하자(늙자)로 정했다. 그래서 다니고 있던 방송국을 그만두었고 방안에 틀어박혔다. 일년 동안 정말 실컷 썼다. 형식실험과 문체 실험을 동시에 해 보았던 일년이었다. 오로지 작품에만 전념했다. <풍금이 있던 자리>에 수록되어 있는 중 .단편이 다 그때 썼던 작품들이다. 이젠 서른이 되어도 되겠다 싶었다. 일년동안 하고 싶은 일에만 철저히 매달려봤으므로 다시 직장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도 동시에 했다. 책으로 출간할 준비를 하면서 일자리도 동시에 알아보고 있었는데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출간된 책이 곧 재판에 들어갔고 ,또 곧 삼판에 들어갔다. 출판사 측도 저자인 나도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었으므로 이게 무슨 일이지? 싶었다. <풍금이 있던 자리>는 내게 작업실과 시간을 동시에 가져다주었다. 어쩌다 보니 그런 꿈같은 일이 내게 생겼다. 나는 그걸 행운이었다고 생각하지 성공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문학에 있어서 성공이란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풍금이 있던 자리> 이후 지금까지 나는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실컷 썼다.

  하지만 지금껏 성공했다는 느낌에 젖어본 적이 없다. 한 작품을 붙들고 있다가 끝을 내는 순간, 나의 한계를 점점 더 확인할 뿐이다. 여기까지다, 여기가 내 한계다, 하면서 뒷문을 조금 열어놓고 마침표를 찍는 것이다. 그 마침표를 찍는 자리가 나의 한계이고 나는 거기서 또 새 작품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쓴 작품 중에 어느 작품이 마음에 드느냐? 물어오면 나는 대답을 못하겠어서 글쎄, 그 작품은 아직 쓰여지지 않았겠지요, 하고 만다. 글쓰기는 그런 것 같다. 끝도 없고 성공도 없다.

  언제나 고단한 시작이 막막하게 가로놓여 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소설가가 되고 싶다는 후배가 있으면 자기 자신에게 절실히 묻고 또 물어보라고 한다. 이것 아니면 안되겠는가? 꼭 이것이어야 하겠는가? 하고. 열 번 물어서 열 번 다 그렇다는 대답이 나오는 사람만이 문학의 길로 들어섰으면 한다. 들어섰으면 그때부터는 거기에 모든 자존심을 걸라고 말하고 싶다. 나는 개개인의 자존심이 그 사람의 인생이라고 본다. 그 자존심을 아무데나 걸 일은 분명 아니지만 소설 쓰기는 인생을 한번 걸어 볼만한 일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소설 쓰기가 특별한 전망이 있는 건 아니다. 아니 처음부터 소설 쓰기란 예술행위는 전망의 반대편에 서 있는 작업인지도 모른다. 현실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것에 마음을 대고 있는 것이 소설 쓰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대로 전망을 창조해 낼 수도 있는 게 소설가이기도 하다. 생각해 보라. 이 문명의 시대, 과학의 시대에 내가 지은 문장으로 모르는 사람들을 서로 소통시키는 희열이 전망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진심으로 소설가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으면 아무 일에나 자존심 상해하지 말고 오로지 소설에만 자존심 상해하면서 언제나 소설 곁에 있어야 한다. 비단 소설만이 아니고 세상의 모든 꿈이 다 그럴 것이다. 꿈이 있으면 늘 그 꿈을 잊지 말고 늘 그 꿈 곁으로 가고 있는 마음이 중요하다. 그렇게 살다보면 설령 그 꿈을 이루지 못한다고 해도 그 가까이에는 가 있을 것이기에. 나는 인생의 성공은 꿈을 이루느냐, 못 이루느냐에 달려있는 게 아니고 그 꿈과 함께 사느냐, 아니냐에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소설가가 되겠다는 꿈과 함께 살기 시작한다면 그 꿈은 많은 것들의 내면을 보게 해줄 것이며 그 관찰력 때문에 엉뚱하다는 소릴 듣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소설을 쓰려고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내 인생 앞에서 발생한 상황에 늘 마음의 눈을 뜨고 진심으로 그 상황에서 인간으로서 행동하다보면 저절로 사회와 사람에 대한 모럴이 싹트는 것이다. 진심으로 소설가가 되려고 하다보면 저절로 그런 마음의 눈이 떠진다.

  인생에 그냥 지나가는 일이란 없다. 특히 소설가에겐. 하지만 소설가는 결국 현실주의자이다. 소설이라는 것이 현실의 반영 없이는 불구가 되는 운명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의 서두에 내가 받았던 어떤 상의 수상소감을 인용한 바가 있는데 그 수상소감은 다음과 같았다. 인용부호 없이 그걸 옮겨 적어보는 것으로 끝인사를 대신해야겠다.

  내겐 글쓰기가 타인과 나 사이에 생긴 균열, 생과 소멸 사이에 얼룩져 있는 쓰라림들을 견디는 유일한 방식이다. 한밤중에 어두운 얼굴로 더듬더듬 문장을 골라 끊긴 길을 조금 이어보고 있으면 사랑이나 죽음 욕망이 일렁이는 심연 저편이 온화해진다. 그러나 여전히 쓰는 일은 끔찍하게 고독하다. 이렇게 가긴 가지만 늘 등짝에 멍이 들어 있는 기분이다. 큰 그늘에 스며들어 없어지고 싶을 때도 있다. 내가 나를 지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순간이 오래 지속될 때는, 겨우 유지하고 있던 선이 짓이겨지는 걸 목도하기도 한다.

  그러나 별일이다. 매번 나도 잘 모르는 귀소 본능에 의해 깊은 밤중이나 신 새벽에 책상 앞에 앉는 일로 존재감을 느껴 왔다. 이와 같이 일생을 불안전하게 흔들리며 쓰고 있겠다. 때로 으깨어지면서. 다만 훗날에도 처음과 같이 나와 소설이 간격없이 서로를 절실히 흡수하기를 원해본다. 작가가 직업의 개념이 아니듯이 쓰는 일이 삶과는 무관한 지어내기여서는 곤란하겠기에.

  자, 숨을 가다듬자.


<소설가 신경숙 19일 문학평론가 남진우씨와 결혼>  - [한국일보](1999. 6. 20)

  소설가 신경숙(申京淑36)씨와 문학평론가 남진우(南眞祐39)씨가 19일 서울 하림각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김화영(金華榮)고려대 교수의 주례, 문학평론가 황종연(黃鍾淵)씨의 사회로 가수 정태춘ㆍ박은옥씨가 축가를 부르는 가운데 진행된 식에는 가족 친지 50여명과 문인 30여명이 참석했다.

  신씨는 최근 장편 <기차는 7시에 떠나네>가 베스트셀러가 되는 등 90년대 들어 <외딴 방> <깊은 슬픔> 등으로 화제를 모은 소설가. 남씨는 시인이자 평론가로 소천비평문학상 등을 받았다. 두 사람은 당초 이날 서울의 한 호텔에서 가족모임 형식으로 식을 올릴 예정이었으나 전날 언론을 통해 사실이 알려지자 급히 장소와 시간을 변경했다.